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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의학 이야기
관리자
2016-08-31 11:23:26

선인재칼럼 7-25-2011

 

재활의학 이야기

 

아주의대 재활의학교실 임 신영

 

재활의학은 미국의 러스크 박사(Howard A. Rusk, MD; 1901~1989)에 의하여 의학의 새로운 분야로 발전하였으며, 재활의학의 핵심 분야인 물리치료는 엘리자베스 케니(Elizabeth Kenny; 1886~1952)라는 호주의 한 여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두 선구자의 열정과 신념으로 많은 장애인이 재활을 통하여 장애를 극복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재활의학 태동기의 두 거장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러스크 박사는 미국 내과 의사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자원하여 부상병들을 치료하였다. 어느 날 병실 천정에 거미집이 있어 병원 측에서 이 거미집을 청소하였는데, 한 병사가 이렇게 말했다. 거미가 거미집을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병원에서 청소를 한다고 거미집을 없애버려 지루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러스크 박사는 부상당한 군인들이 무료하고 지루한 회복기를 보내는 대신, 의미 있는 활동을 통해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었고, 이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민간 병원에서도 이러한 재활 프로그램을 사용하게 되었다. 러스크 박사는 세계 처음으로 뉴욕대학에 재활의학과를 개설하였고, 또한 1946년부터 23년간 뉴욕 타임스에 재활의학에 관한 사설을 매주 기고하였다. 1955년에 World Rehabilitation Fund를 설립하여 70~80개국 의사들을 초청하여 재활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들의 95%가 모국으로 돌아가 전 세계적으로 재활의학을 시작하였다. 러스크 박사는 1989년에 뇌졸중으로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0년경 호주 북동부 퀸스랜드(Queensland) 지역에 소아마비로 추정되는 질병이 유행하였는데, 마침 조산원(midwife)으로 일하던 케니는 팔다리가 마비되고 관절이 굳어가는 아기를 치료하게 되었다. 케니는 당시 아기의 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팔다리 근육이 짧아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양모 온습포를 만들어 온찜질한 후 짧아진 근육을 늘려주고 운동을 시켰다. 이후 케니는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다른 아기들에게도 같은 치료하여 상당한 호전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신경근병변으로 마비되고 단축된 근육에 온습포를 이용한 표재열 치료를 한 후 수동적 관절가동범위 운동과 조기 재활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당시 급성 소아마비 환자들에 대한 의료계의 표준 치료는 부목 등을 이용한 고정과 절대안정이었는데, 케니의 치료 결과가 기존 표준 치료에 비하여 우수하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 케니의 치료법은 기성 의료계와 충돌하게 되었고, 1938년에 호주와 영국의 의료계는 케니의 이론과 치료법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이에 반대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 케니는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였고, 곧 미국 의학계의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되었다. 케니는 미네소타 의과대학에서 자신의 치료법을 강의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 전역에서 그녀의 치료법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Elizabeth Kenny Institute가 설립되었다. 그녀의 극적인 이야기는 1946년 ‘Sister Kenny’라는 제목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1951년에는 갤럽이 선정한 유명여류인사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케니는 1952년에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호주에서 사망하였다. 케니의 치료법은 현대적 물리치료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물리치료법이 개발되어 재활의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아버지는 딸이 의대에 입학할 때부터 재활의학을 전공하기 바라셨는데, 본과 4학년이 되어 무슨 과를 전공해야 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던 재활의학과를 찾아가 졸업 전에 일찌감치 지원하였다. 인턴 때도 재활의학과를 돌았고 1989년 말부터 예비 전공의로 재활의학과 근무를 시작하였다. 소변을 보지 못하는 환자들의 소변을 뽑으며 병실 TV로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1990년 새해를 맞은 것이 얼마 전 같은데 벌써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아주대학교병원이 개원하던 1994년 우리나라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약 8,500불로 사회 전체가 넉넉하지 않았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 자원도 거의 전무하여 가난한 장애인들이 재활 치료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한 재활의학과가 무슨 일을 하는 과인지도 잘 모르고 심지어는 재활의학과와 재활용을 혼동하여 재활용과가 어디냐고 물어보기도 하는 등 재활의학 의사에게도 어려움이 많던 시절이었다. 성공적인 재활을 위하여 재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어서, 재활의학은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불 이상이 되어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는 분야라고 하는데, 1997년 말에는 기다리던 국민소득 2만불 시대 대신 IMF 경제 위기가 발생하여 재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 시대에 진입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복지 예산도 많이 늘어 이제는 여러 자원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재활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재활의학에 대한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 재활의학과 전문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고, 재활의학과 전공의가 되겠다는 젊은 의사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면, 재활의학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이고 이에 따라 재활의학은 더욱 발전할 것이어서, 재활의학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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